[연재] 시대의 배경과 함께 보는 미술의 역사 (3)

합리주의와 이성을 강조한 신고전주의를 거부하고 새롭게 등장한 낭만주의는 18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 회화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과 같은 다양한 장르에 있어 주도적인 사상으로 자리매김한다.

◇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낭만주의 미술은 영국과 관련이 깊다. 18세기 중엽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농업과 수공업에서 제조업과 기계를 사용하는 산업사회로 변화한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사회 · 경제 구조의 변혁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이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도시에서 벗어나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훗날 낭만주의가 탄생하는 바탕이 되었다.

1827년 파리 살롱 전엔 앵그르의 '호메로스의 예찬'(1827, 루브르 박물관)과 들라쿠르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루브르 박물관)이 전시된다. 이 작품들은 각각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는 작품으로 두 사조의 대립을 보여준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고전주의의 창시자이자 리더였던 다비드는 프랑스 왕실의 궁정화가였던 탓에 위기를 느끼고 벨기에로 망명한다. 다비드가 프랑스를 떠난 후 실질적으로 프랑스 미술계에서 고전주의를 이끌어갈 인물이 부재하게 되고 그 후계자로서 앵그르가 낙점되는데 이 '호메로스의 예찬'이 그 예로 고전주의 정신에 아주 충실한 작품이다. 동시에 같이 전시되었던 들라쿠르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낭만주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이었던 사르다나팔루스는 반란이 일어나자 궁 안의 사람들을 죽이라 잔인하게 명한다. 신고전주의의 기념비적이며 도적적인 주제와는 거리가 멀고 구성도 비이상적이며 색채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감정을 과장해서 표현해 피로 물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호메로스의 예찬」, 1827, 루브르 박물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호메로스의 예찬」, 1827, 루브르 박물관

외젠 들라쿠르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767, 루브르 미술관
외젠 들라쿠르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767, 루브르 미술관

18세기 프랑스에서는 혁명의 여파 속에 낭만주의자들이 이성과 질서의 가치를 강조한 계몽주의에 대한 환멸과 동시대에서 절망, 좌절, 무기력 등을 겪으며 현실도피를 추구하게 된다. 그로 인해 그림 속에서 종교, 꿈, 환상, 무한, 죽음, 사후 사계 등이 다뤄지고 주제 범위 역시 크게 확장된다.

앞서 신고전주의가 합리주의와 이성, 고대로의 회귀를 추구했던 것과는 반대로 중세적으로 간주된 미술의 요소와 중세의 이야기 부활, 개인의 감정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낭만주의는 이성에 치우친 냉정이 개인의 감정과 정열을 없애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있던 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낭만주의의 작품 속에서는 신고전주의에서 볼 수 없었던 생동감과 다양한 색채에 동적인 개인의 감수성이 느껴지는 특징을 나타나게 된다. 또한 개인의 감정을 넘어 상상이 담긴 그림까지도 등장한다.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혁명들은 공포 정치로 변질되고 나폴레옹의 정치로 유럽이 전쟁터로 변하게 되었고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으며 1830년엔 프랑스에서 또 다른 혁명이, 1848년에는 유럽 전역에 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유럽인들은 이러한 사건들로 동시대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신고전주의가 새로운 현실을 반영하기엔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 영국의 낭만주의

낭만주의 미술은 크게 영국, 프랑스, 독일의 낭만주의로 구분된다. 먼저 영국의 낭만주의는 컨스터블의 작품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존 컨스터블(1776~1837)은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풍경 화가로 평화로운 영국 시골 풍경을 그렸다. 그는 야외에서 그린 스케치를 기반으로 빛의 변화와 함께 순간적인 실제 자연을 표현하고자 했다. 어느 하루도 서로 같은 날이 없다는 말은 한 컨스터블은 나중에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특히 컨스터블은 광활하고 압도적인 자연이 아닌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 속 자연을 그렸다. 신고전주의가 자연을 숭고한 대상으로 이상화했던 것과는 달리 보이는 그대로를 표현해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건초마차'(1821, 런던 내셔널 갤러리)는 이러한 컨스터블의 시도를 잘 보여준다. 고향집 이층 창문을 통해 바라본 자연 풍경을 보여주는데 전경엔 냇가가 있고 그곳을 가로지르는 마차가 보인다. 후경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늘에선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양상이 실감 나게 전개되고 있고 마차가 지나가면서 일렁이는 물결의 모습 나뭇가지에 표현된 흰색의 점들이 빛의 반사를 잘 보여준다. 전체적인 화면 구성은 잘 짜인 인위적 구도가 아닌 지리 감이 다양하고 울퉁불퉁한 선으로 이뤄져 한층 자연스럽다. 이처럼 자연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자연적 태도로 바라본 시도는 낭만주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존 컨스터블, 「건초마차」, 1821, 런던 내셔널 갤러리
존 컨스터블, 「건초마차」, 1821, 런던 내셔널 갤러리

윌리엄 터너(1775~1851)의 시도는 컨스터블보다 파격적이다. 컨스터블은 시골 풍경을 주로 그렸지만 터너는 관대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을 그렸다. 따라서 화풍 또한 거칠고 역동적이다. 자연의 변화 과정에 주목하면서 순간적이고 역동적인 장면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눈보라: 알프스를 넘어가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1812, 테이트 갤러리)는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알프산을 넘었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한니발의 군대가 원주민의 공격을 받으며 진격하고 있는데 눈보라에 파묻혀 실루엣으로 보인다. 인류 역사상 중요하게 꼽히는 카르타고 전쟁이지만 이 작품 속에선 광활한 자연 앞에 무의미하게 처리되어 있다. 한니발의 모습은 잘 나타나지 않아 그의 영웅적인 모습 또한 보이지 못해 대자연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윌리엄 터너, 「눈보라: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 1812, 테이트 갤러리
윌리엄 터너, 「눈보라: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 1812, 테이트 갤러리

◇ 프랑스의 낭만주의

주변국과는 다르게 비교적 고전주의가 우세했던 프랑스에서도 낭만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는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개인의 감정 중 공포와 고통에 주목했다. 특히 사회적인 고통을 주제로 작품들을 남겼는데 '메두사 호의 뗏목'(1818~1819, 루브르 미술관)이 그 예이다.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세네갈로 군사와 정착민을 싣고 가던 중 아프리카 해안에서 메두사 호가 난파된다. 구명보트에 타지 못한 150여 명의 승객들은 부서진 배 조각으로 뗏목을 만들어 구조를 기다리게 되는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단 15명이었다고 한다.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 방식은 아직 고전적인 방식을 그대로 하고 있어 돛대와 연결된 밧줄이 희미한 삼각형을 형성하고 개인은 상당히 근육질의 선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이 작품에서 낭만주의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형식이 아닌 주제이다. 화면 속 인물들은 먼 수평선 너머 보이는 배를 보고 옷가지를 흔들고 있는데 먼 곳의 배가 이곳을 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죽음의 공포와 불확실성 등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요소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 호의 뗏목」, 1819, 루브르 미술관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 호의 뗏목」, 1819, 루브르 미술관

앞서 말했듯 제리코가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라면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는 낭만주의의 전성기를 대표한다. 그는 '키오스 섬의 학살'(1824, 루브르 박물관)을 출품하여 본격적으로 낭만주의 화가 대열에 합류한다. 키오스 섬은 당시 그리스의 영토였지만 터키의 지배하에 있었다. 두 나라는 문화와 종교의 차이가 극명했기 때문에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나고 갈등은 반란으로 이어졌다.

터키군은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이 소식은 파리의 시민들에겐 분노를 일으킨다. 유럽인은 터키의 문화를 야만적이고 민주적이지 않은 전제국가라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문화의 뿌리로 생각한 그리스가 터키에게 무자비하게 밟힌 것이 분노의 근원이었다. 인물이 전경에 배치되어 황량한 들판이 부각되고 있으며 밝음과 어두움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색채 면에 있어서도 붉은색과 녹색의 보색 관계를 활용하고 있다. 이런 색채의 구성은 1824년 살롱전에 출품된 컨스터블의 '건초마차'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키오스 섬의 원주민들의 저항과 실패, 좌절이라는 주제도 이 작품에 낭만주의적 성격을 부여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외젠 들라쿠르아, 「키오스 섬의 학살」, 1819, 루브르 미술관
외젠 들라쿠르아, 「키오스 섬의 학살」, 1819, 루브르 미술관

◇ 독일의 낭만주의

독일에서도 풍경화를 중심으로 낭만주의 미술이 전개된다. 대표적 인물로 카스파르 프리드리히(1774~1840)를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산속의 십자가'(1807,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와 '떡갈나무숲속의 수도원'(1809~10, 샤를로텐부르그 궁전)은 독일 낭만주의를 보여준다.

'산속의 십자가'는 처음 공개되었을 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시점이 불분명하며 원근법이 파괴되었고 대기 원근법 또한 지켜지지 않아 기존 아카데미의 규율을 완전히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일종의 풍경화로 그의 말을 인용하면 “지는 저녁해는 성부의 빛을, 더 나아가 신이 자신을 인간에게 직접 드러내는 시기는 지났다”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풍경화를 종교화의 지위로 격상시켰다는 의의를 갖는다. 자연 풍경에 종교적 감정을 투영시키는 경향이 독일의 낭만주의 회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산속의 십자가」, 1807,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산속의 십자가」, 1807,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

'떡갈나무숲속의 수도원'도 역시 낭만주의 회화 작품이다. 전경에는 장례 행렬이 나타나며 거의 폐허화된 중세 교회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중경에는 잎사귀 없는 앙상한 떡갈나무가 보이며 그 너머로 새벽빛이 떠오르고 있고 전경의 장면은 죽음을 의미하며 앙상한 떡갈나무가 의미를 강조한다. 폐허가 된 중세 교회 또한 사와 무와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의미한다. 떠오르는 빛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무가 아닌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고 있다. 두 작품에서는 자연 풍경에 종교적 감정을 투영시키는 경향이 나타난다. 독일의 낭만주의 회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떡갈나무숲속의 수도원」, 1809-10, 샤를로텐부르그 궁전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떡갈나무숲속의 수도원」, 1809-10, 샤를로텐부르그 궁전

◇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환상적이라는 어원에서 알 수 있듯 낭만주의는 이성과 합리성, 절대적인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 낭만주의를 이어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사실주의’가 나타난다. 사실주의는 아카데미가 옹호한 이상화된 고전주의나 낭만주의가 선호한 상상과 이국적 주제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후에는 사실주의가 나타난 시대상과 더불어 당시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새빈 라이프&컬처팀 객원기자 lifenculture@nextdaily.co.kr

나새빈 기자는 미술사를 전공했다. 젊은 세대의 눈높이에서 어렵고 따분하게만 느껴지던 미술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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