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10월, 그간 잊고 있었던 스페인어를 연습하기 위해 10일 일정으로 마드리드에서 보냈다. 도시를 걸으면서 스페인어를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밤에는 에어비엔비 숙소에서 스페인어를 독해했다. 10일 동안 스페인어에 몰입하면서 그간 잊었던 단어와 동사 변화를 오랜만에 접하면서 스페인 실력이 조금씩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유창해지려면 오랜 시간 스페인어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스페인어를 연습하는 동안 두 가지 2인칭 사용법에 대해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됐다. 유럽의 여러 다른 언어처럼 스페인어는 두 가지 2인칭 호칭이 있다. 하나는 usted이고 또 하나는 tú이다. Used은 윗사람, 거리 있는 사람, 모르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tú는 가족간, 동료간 혹은 친밀한 사람 사이에 사용한다.

한국어의 복잡한 존댓말 표현에 비해서 간단하지만 2인칭이 하나밖에 없는 영어에 비하면 복잡하다. 마드리드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usted을 사용해야 되는데 스페인어를 자주 사용했던 대학 시절에 주로 사용했던 tú가 무심결에 튀어나왔다. tú에 익숙했었기에 usted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다. 2인층 호칭을 바꾸면 동사 어미도 바뀌지만 그 어미는 3인층과 똑 같은 것이라 더욱 어려웠다. 스페인어는 동사의 어미가 각 호칭 마다 달라 대명사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아 동사의 변화를 잘 이해해야 호칭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필자가 만났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usted로 대화했는데 하루에 한번 정도 tú로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필자가 한국에 있을 때 한국어가 서투른 외국인을 상대로 몇 몇의 한국인들이 큰 목소리로 반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상대방은 스페인어가 유창하지 않은 필자를 돕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속도를 줄이고 tú로 쉽게 말하려고 한 것 같다. 반말투와 같은 느낌이었지만 돕겠다는 마음이라 생각해 고맙게 느끼며 반갑게 대화했다.

스페인어의 2인칭 사용에 대해 고민하면서 한국어 생각이 자주 났다. 처음 한국어를 배울 때 필자는 일본어를 먼저 배워서 존댓말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2인칭 대신에 이름이나 직업과 관련된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자연스러운 대화에서는 스페인어처럼 호칭을 생략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호칭에 맞는 동사 변화가 없지만, 존댓말로 하면 상대방을 높이기 위해 동사가 활용된다.

완전 평등한 사회가 없듯이 평등한 언어도 없다. 언어가 사용되면서 인간이 만든 여러 불평등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다. 대화를 통해서 화자들의 관계나 직업 등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어는 불평등이 심하게 나타나는 언어 중 하나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에는 문제가 크지 않지만 서로 아는 사이에서는 직업 또는 나이를 알면 좀더 말이 편해진다. 이러한 불안 때문에 한국인을 만나면 명함을 교환하는 것이 편하다. 좀 더 친해지면 나이를 알게 되고 그러면 더욱 대화가 편해진다.

필자는 서울대 교수 시절에 누구를 만나면 ‘교수님’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자유롭게 집필과 연구 활동으로 뚜렷한 직업이 없어서 ‘작가님’ 혹은 ‘선생님’으로도 불린다. 예전부터 필자를 알았던 이들은 여전히 ‘교수님’이라 부른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경우 직접 물어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피차에 서로 불편해질 때가 종종 있다.

‘교수님’이란 호칭에서 ‘님’은 재미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직업에 따로 높이는 말이 필요해 ‘님’을 붙인다. 외국어에서 나온 직업 명칭에도 붙이는데 ‘큐레이터님’이나 ‘코디네이터님’과 같은 어색한 말도 생긴다.

그런데 ‘님’은 한국어 역사에서 보면 매우 재미있는 변화의 과정이 있다. 원래 높이는 의미에서 호칭 뒤에 붙이지만, 민주화 이후 바로 이름 뒤에 붙이게 되었다. 민주 사회에서는 직업, 나이, 사회적 지위를 몰라도 무난히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 필요한데 ‘님’이 바로 적합한 역할을 했다. 한국어의 일반적인 호칭에 ‘씨’가 있지만, 딱딱하고 어감이 좋지 않다. 그런 이유로 ‘님’을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선생님’의 줄임 말인 ‘샘’ 또는 ‘쌤’은 ‘님’과 비슷하지만, 서로 친근한 사람들끼리의 호칭이고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의 사용은 어색하다. ‘샘’도 민주화 이후 편안한 호칭을 찾는 노력 속에 탄생한 말이다.

보통 언어는 사회성을 가지고 있어 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회 변화를 촉진하도록 언어를 개혁하기도 한다. 영어의 대표적 사례는 ‘Miss’과 ‘Mrs’을 통합한 ‘Ms’이다. 이것은 1960년대에 여성 운동 속에서 나타난 말이다. 당시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Miss’와 결혼한 여자를 ‘Mrs’를 부르는 것은 결혼이라는 변수 때문에 차별적 말이라는 인식이 커져갔다. 결혼과 상관 없이 중립적 호칭이 필요해 ‘Ms’가 빨리 보급이 되었다.

이웃 나라인 일본은 메이지유신부터 언어 개혁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유럽과 같은 국가를 만들기 위해 일본어를 서양 언어의 기준에 맞게 개혁해야 하는 주장이 있었다. 그 결과는 19세기 말에 ‘언문일치’, 즉 말과 글은 같아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시에 서양 언어에 한자가 없어 한자가 구식 문자라는 주장이 제기됐고 일본어는 가나(히라가나와 가타카나)만으로 쓰자는 운동이 어느 순간 활발했지만 정착되지는 못했다. 몇 몇 사람들은 일본어를 로마자로 쓰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메이지 유신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은 새로운 민주 국가로 태어나려고 새로운 헌법을 도입하고 많은 사회 개혁을 실시했다. 이때도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해 한자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폐지하지 못하고 대신 어려운 한자를 간소화해서 약자를 만들었다.

그런데 호칭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개혁은 직업 또는 지위와 관련한 호칭 대신 평등하게 누구나에게 2인칭인 ‘아나타’(あなた)를 쓰자는 운동이었다. ‘아나타’는 ‘당신’ 또는 usted와 같이 존중의 2인칭이지만 ‘당신’과 달리 서로 모르는 사람 사이에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어의 ‘씨’처럼 어감이 별로 좋지 않아 대개의 일본인은 직업 또는 지위와 관련한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평등하고 무난한 2인칭으로 도입하려고 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서 정착하지 못했다.

‘상’(さん)과 ‘사마’(さま)도 마찬가지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이름 뒤에 평등한 호칭으로 ‘상’이 많이 보급이 되었지만, 상대방을 높이고 싶을 때 ‘상’은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해서 높임말인 ‘사마’와 다양한 직업과 관련한 명칭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님’, ‘Ms’, 그리고 ‘상’의 공통점은 상대방에 대한 정보 없이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도시화된 선진 민주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모르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친다.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은 보통이다. 서로 아는 사람 사이에도 평등한 입장에서 만나는 사람이 많아 윗사람, 아랫사람이라는 구별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 세 호칭 중에 ‘님’은 여전히 정착되지 못하고 있고 ‘씨’는 뭔가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듯해 불편하다. 결국 아직까지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 없다. 그 원인은 민주화하면서 언어 개혁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영어의 ‘Ms’는 뜨거운 1960년대의 사회적 운동 속에서 나타났고 ‘상’의 보급도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일본을 민주 국가로 만들려는 열의 속에 나타났다.

언어의 복잡성은 때로는 매우 흥미롭다. 대화 중의 상대방에 대한 호칭의 사용은 언어마다 독특하고 다양하며, 바로 그 것이 인류의 자산인 셈이다. 우리가 부딪치는 한국어의 문제 중 하나는 복잡성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호칭의 불평등일 수도 있다. 명함을 봐야 상대방을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것은 많은 한국인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요인 중 하나이다. 명함과 관계 없이 평등하고 서로 존중하는 민주 시민을 위한 호칭이 필요하다. ‘님’도 좋고 ‘씨’도 좋고 ‘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어려운 대가를 지불하며 이룩한 한국의 민주주의에 맞는 언어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 첫 단추를 이름 뒤에 편하고 평등한 호칭 사용을 보편화하는 것으로 꿰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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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뉴스팀 (news@next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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