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약간은 진보적인’ 미국 유력 잡지에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의 최근 행보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기사는 주로 대통령 영부인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내용 하나가 있었다. 멜라니아의 영어 실력이 짧다는 것인데 비하하는 태도까지 느껴졌다. 보통 이 매체는 사회적 다양성을 중요시하고 이민자와 난민을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가 원어민처럼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는 슬로베니아이라는 1991년에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작은 나라 출신이다. 이 나라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 접해 있어 역사적으로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지역과 교류가 많았다. 때문에 유럽의 다른 나라가 그렇듯이 다양한 외국어를 배울 수 있는 나라이다. 멜라니아의 모국어는 슬로베니아어이지만, 영어 이외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구 유고슬라비아의 공용어인 세르보크로아트어를 한다는 보도가 있다. 이 중 언어와 역사적인 측면에서 세르보크로아트어는 잘 하겠지만, 다른 언어는 초보 수준일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사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이 필자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라 비판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자연히 대통령 부인인 멜라니아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고 연설이나 인터뷰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런데 영어로 말하는 것을 보면서 영어를 잘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인터뷰와 연설을 몇 개 더 봤는데 영어를 참 잘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인터뷰는 모든 방송국에서 진행됐다. 사실 외국어로 하는 방송 인터뷰는 스트레스가 많은 자리이다. 잘 못하면 말이 막히면서 문법과 발음 실수를 하게 되고 그 것을 느끼는 순간 더 말이 꼬이게 된다.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도 금방 막히고 더듬더듬 말하게 된다. 그런데 멜라니아는 큰 실수 없이 인터뷰를 잘했다. 다만 몇 개의 관사와 복수가 생략되고 화려한 제스처나 유행어 등을 사용하지 않아 다소 무뚝뚝한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도 영어는 유창했다.

멜라니아의 영어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닌데 왜 그 매체는 비하했을까? 그렇다면 남편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감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되지만 매체가 그런 단순한 이유로 균형을 잃을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기사의 다른 내용은 균형 있게 썼고 화제가 될 만한 내용은 없었다. 그렇다면 문제가 더 크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영어 원어민의 우월주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 우월주의를 이야기할 때 주로 프랑스가 많이 거론된다. 사람들은 프랑스인은 자국어에 대한 자긍심이 강해 영어 사용을 싫어해서 외국인이라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를 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프랑스 정부에서도 정책적으로 프랑스어의 보호와 보급을 적극적으로 한다. 그런데 이는 과장된 부분이 많다. 프랑스어에 대한 자부심은 사실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영어가 필수 과목이고 열심히 영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정책적으로 프랑스어를 중요시 하지만 자국어에 대한 보호 정책은 프랑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서 영어 우월주의는 보이지 않지만 의외로 크게 작용하고 있다. 미국은 경쟁이 심한 이민 사회라 장점과 단점을 확실하게 따진다. 그럴 경우 영어 실력이 영향을 많이 미친다. 영어 실력이 꼭 필요하지 않은 직업은 별 문제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출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남의 단점을 꼬투리 잡으려는 태도 때문이다.

이러한 영어 우월주의가 사실이라면 피해 보는 계층은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처럼 외국 이민자와 미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이다. 결국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경쟁이 유리하도록 만든 편견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편견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영어 우월주의에 대한 ‘반대 운동’을 시작할 수 있지만, 영어 원어민들의 공감을 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대신 영어 우월주의 현실을 먼저 봐야 한다. 활동 분야 마다 많이 다른데 가장 심한 분야가 정치이다. 금융계, IT계, 의료계, 과학계, 미술계, 음악계 등의 분야에서는 영어 우월주의가 그렇게 강하지 않고 실력이 더 중요한 평가 요소이다. 유명한 투자가인 조지 소로스는 헝가리 출신이고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사티아 나델라도 인도 출신이다. 이외에 수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의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례가 많다.

아쉽게도 정치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미국 국회의 현재 상하원의 구성원을 보면 4.2%가 이민자이지만, 미국 전체 인구 중에 14.4%가 이민자이다. 주와 시 단위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사는 로드아일랜드 주의 인구가 13.5% 이민자이지만, 정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 지난 2016년 대통령 선거 투표율을 보면 백인은 65%, 흑인은 60%이었지만, 이민자 인구가 더 많은 아시아계와 히스패닉계는 49%와 48%이었다.

이민자 정치인이 적다보니 정치 분야에 활동하는 비원어민에 익숙하지 않다. 비원어민이 정치에 참여하면 많은 원어민 마음 한 켠에 내재돼 있는 영어 우월주의가 자극을 받아 표면에 나타난다. 영어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배타적 태도이다.

자,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더 많은 이민자가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제도적으로 유럽과 한국처럼 영주권자에게 주와 지역 선거에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 이민자가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헌법을 개헌해야 한다. 정치 참여는 투표뿐만 아니라 정당에 참여하면서 출마도 많이 해야 한다. 정계가 결국 사회를 지배하는 특권층이 아니라 사회를 대표하는 시민들로 이뤄져야 한다. 아쉽게도 멜라니아의 남편은 백인 우월주의를 부흥하고 이민자를 환영하지 않은 정치인이라 열린사회를 만들기 쉽지 않다. 쉽지 않기 때문에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듯이 희망을 갖고 더욱 노력해야 한다.

로버트 파우저 robertjfouser@gmail.com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미시간대에서 일어일문학 학사 및 응용언어학 석사,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와 일본 교토대에서 영어와 영어교육을 가르쳤고,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교양 한국어 과정을 개설해 가르쳤다. 한국 사회를 고찰하면서 한국어로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을 출간했다. 취미는 한옥과 오래된 동네 답사, 사진촬영으로 2012년 종로구 체부동에 ‘어락당(語樂堂, 말을 즐기는 집)’이라는 한옥을 짓기도 했으며, 2016년 교토에서 열린 ‘KG+’ 국제 사진전시회에 사진을 출품했다. 현재 미국에서 독립 학자로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어로 ‘외국어 문화사’를 집필 중이며 참여형 새로운 외국어 교육법을 개발 중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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